오늘은 서울사대부고 30회 동기 친구들과 강화역사기행을 가는 날이다. 10여 년 전 열린의사회 몽골 의료봉사에서 만난 노건 친구의 역사 문화해설로 대한민국의 과거, 현재, 미래가 공존하는 역사의 현장으로 떠나는 것이다. 오후에 비 예보가 있지만 아침에는 날씨가 너무나 좋다. 더구나 남녀 공학이라서 여자 친구들이 전날 저녁 늦게까지 준비한 감 등 과일과 당일 새벽 3시에 일어나서 정성 들여 요리한 음식을 감탄하며 맛있게 먹었다. 강화대교를 건너 54개의 돈대(현재의 해군초소) 중 하나인 월곳돈대 연미정에 도착하니 한강하구에서 가장 뛰어난 경관을 보이는 정자가 있고, 600년 된 두 그루의 느티나무 중 한 나무가 지난 태풍으로 쓰려져 있다. 이곳은 정묘호란 때 여진족과 형제의 맹세를 한 치욕의 역사 현장이다. 해협을 낀 유일한 성인 문수산성을 배경으로 강화의 멋진 가을 풍광을 즐기면서 2000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120여 기의 고인돌이 있는 강화 고인돌마을에 갔다. 이곳에 있는 세계에서 가장 큰 53톤의 상부돌이 영국의 스톤네이즈의 돌보다 크다고 한다. 3000년 전에 500명의 장정이 동원되어 돌을 옮겨 만들었다고 추정한다. 잠시 토굴에 들어가 선조들의
오늘은 초등학교 친구들이 천안의 현충사와 독립기념관으로 1박 2일의 가을 소풍 가는 날이다. 구름 한 점 없는 축복받은 가을날이다. 필자는 토요일 진료를 마치고 오후에 SRT로 천안에 조금 늦게 도착하였다. 도착하자마자 친구들의 환대를 받고, 초대 회장으로서 인사말과 노래를 하게 되었다. 친구들은 낮에 임진왜란에 나라를 구하신 이순신 장군의 현충사에 들러 많은 사진을 카톡에 남기었다. 새로운 회장도 선출하고 즐거운 여흥 시간을 보냈다. 항시 초등학교 친구들을 만나면 어릴 적 동심의 세계로 돌아가서 좋다. 저녁 늦게까지 친구들과 함께 이야기꽃을 피우며 즐겁게 시간을 보냈다. 다음 날 아침 조식 후에 독립기념관을 향해 출발하였다. 관광버스로 가는 도중에 친구들의 건강을 위하여 필자가 주장하는 ‘5 components of systemic health’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5 components of systemic health의 첫째는 교합 질환이 있을 때 T scan을 이용하여 교합을 조정해 주고, 부족한 부분은 CBK(cranial balancing key) splint, 즉 두개골균형교합안정장치를 잠잘 때나 운동할 때 끼우도록 하는 것이다. 아울
개원한 뒤 1995년부터 치과대학 보철과 외래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치던 필자는 30년간의 진료를 정리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통합치의학과 전문의 시험준비를 한다면 모든 과목을 공부하며 정리할 수 있는, 꼭 나를 위한 너무나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여 참여하게 되었다. 그동안 ‘교합과 치주와의 상관관계’나 ‘CBK(cranial balancing key) splint and anti aging effects’를 세계보철학회에서 발표하는 등으로 중심위 교합안정장치가 전신 건강에 영향을 준다는 내용을 전하던 강의를 잠시 멈추고 학생의 자세로 돌아가서 30여 년 만에 시험을 준비하게 된 것이다. 마침 치과 공중보건의사이던 아들과 대학원생인 며느리도 같이 시작하였다. 아들, 며느리와 같이 공부하고 서로 도와 가면서 준비하는 소중하고 행복한 추억이 시작되었다. 재작년 12월부터 겨우내 치협회관에서 아들, 며느리와 같이 매주 오프라인 강의를 듣고 매일 아침 온라인 강의를 시청하였다. 매일 빠지지 않는 일이라 부담도 많이 되었지만 너무나 행복한 시간이었다. 그러나 임상 실무교육은 접수하려고 아무리 노력해도 1초도 지나지 않아 마감되어 접수할 수가 없어서
3월 2일. 오늘은 우리 가족에게 신이 주신 선물로 온 손자 ‘진율’이가 태어난 지 백일을 맞는 날이다. 지난주 2월 25일 고향 선배인 전통문화예술원 이성일 이사장께서 마련하신 ‘긔린 것은 다 님이다’라는 만해 한용운 님과 유관순 열사의 3·1운동과 독립선언에 관한 국악공연을 보고 다시는 우리 후손에게는 6·25 전쟁과 한일합병 같은 역사적 치욕이 일어나지 않도록 했으면 한다. 32년 전, 지금은 치과의사가 된 아들이 태어났을 때가 내 인생에서 제일 행복한 순간으로 기억된다. 또한 맨 처음 보았을 때 나하고 너무나 똑 닮아서 깜짝 놀랐다. 그 후 몇 주 동안 환자를 볼 때에도 아들의 얼굴이 떠오르는 신기한 경험도 했다. 손자를 처음 보았을 때 아들과 나와 너무 닮아 또한 놀랍고 신기했다. 내가 보기에는 아직도 어린 아들 며느리가 애기를 낳아서 잘 키울 수 있을까, 부모로서 많은 걱정이 된다. 하지만 하나하나 공부하면서 슬기롭게 즐기면서 행복하게 잘 키울 것을 확신하며, 그런 바람을 모아 이 글을 쓴다. 첫째 ‘세 살 버릇이 여든까지 간다’는 속담처럼, 진율이에게 지금은 법륜스님의 말씀같이 건강과 심리적인 안정을 위해 제일 소중한 시기라서 가족들이 잘 돌봐야
20여 년 동안 치과의사로 살면서 치과계에서 활동하였던 소중한 추억들을 더듬어 즐거웠던 일, 보람 있었던 순간, 아쉬웠던 기억들을 밝혀 우리 후배 선생님들께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처음 개업을 했을 때 우리 동네 치과의사 선배님들이 신고식을 해 주셨고 술을 너무 많이 마셨다. 그때만 해도 대리운전이 없어서 다 쓰러져가면서도 운전하여 집에 왔던, 지금 생각하면 너무 아찔한 추억이 있다. 당시에는 선배님들이 개업한 후배들을 진심으로 축하해 주셨고 당부의 말씀을 통해 치과의사로서 무리하게 행동하지 않도록 경각심을 주셨다.그 후 바로 우리 동네 반장을 맡게 되었는데, 노원구 총 개업의가 25명 정도여서 대부분의 선생님들이 매월 있었던 구이사회에서 만나 회의하고, 저녁도 먹으면서 우의를 다지는 소중한 시간을 가졌다. 그 후로는 쉽지만 조금 시간이 필요한 보건이사, 후생이사 등을 맡아 구강보건 검사나 야유회 등을 기획하여 재미있게 가족 동반하여 놀러 갔던 추억이 있다. 여기서 여러 선후배님들을 만날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또한 문제가 있을 때는 구회 윤리위원회를 개최하여 과대광고나 전단지 문제 등을 조금 보수적으로 더불어 생각했던 모임이 그립다.무엇보다 노원구 부회
20여 년 동안 치과의사로 살면서 제일 보람 있고 의미가 있었던 봉사활동을 하면서의 느낌과 함께 주마등처럼 스쳐가는 추억들을 더듬어 본다.처음 개업하고 3년 쯤 뒤인 3월 한가한 달에 환자들이 많지 않아 병원에서 놀고 있다 보니 무척 따분했다. 그래서 교회 목사님께 전화를 걸어 우리 교회에서 도움을 주고 있는 장애우 27명에게 무료진료를 해 주겠다고 하여 3달에 걸쳐서 보철치료까지 모든 치료를 다 해 준적이 있었다.거동도 불편하셔서 일주일에 2번 2명 씩 오기로 하였는데 5명 이상 같이 와서 병원이 휠체어로 꽉 차 일반 환자들이 불편하게 생각하고 치료를 받지 않고 가신 분도 있었다. 그렇지만 치료를 받고 좋아하시던 우리 장애우들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고 너무나 보람이 있었다.그 후에 산호수중이라는 스쿠버다이빙 동호회에서 의사 몇 분과 소매물도, 백두산 연변 등지에서 구강검진과 발치 등 진료 봉사 후에 스쿠버다이빙을 했던 추억들이 생생하게 기억난다. 연변 의료봉사 후에 백두산 천지에 장비를 메고 1시간을 내려가서 스쿠버다이빙을 즐기면서 봤던 하루에도 12번 변한다는 천지의 장관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그 후에 지금은 모 제약회사의 회장인 지인의 추천으로
치과의사로 풍운의 꿈을 안고 사회에 나온 지도 벌써 27년이 흘렀다. 개인적으로 대학입시에 4년을 계속 실패를 하여 군 입대문제로 야간 공대에 학적을 두고 낮에는 입시학원에서 공부를 하고 저녁에는 대학에 맨 뒷자리에서 힘들게 공부하여 24살에 치과대학 예과 1학년에 입학하였다. 지금 생각하면 고교성적은 나름대로 좋았지만 운이 없어(?) 계속 대학에 떨어지고도 어린 내가 포기하지 않고 결국에는 치과대학에 들어간 또 다른 내가 인생에서 제일 자랑스럽고 대견하게 생각된다.늦게 대학에 들어가니 2~3년 후배님들이 형님으로 잘 대해 주고 너무 재미있게 공부를 하였던 생각이 난다. 우리 때는 졸업정원제가 있어 30%의 학생이 예과 2학년 때까지 성적에 의하여 제적되는 군사정권의 가슴 아픈 기억이 있다. 개인적으로 예과 1학년 때 재시험 걸린 친구들을 위해 방학 때 과외를 해 주고 예상 문제도 풀어 주었던 추억이 있다.늦게 대학에서 공부를 하니 모든 것이 너무 뜻 있고 재미가 있어 대부분 시험 볼 때는 전부 다 눈 감고 강의 노트를 외울 정도로 열심히 즐겁게 하였다. 그 때 부터 나는 전화위복을 가슴에 품고 인생을 살게 되었다. 이십대 초반의 어려웠던 시기가 나에게는 지
치과의사로 산다는 것이 때론 힘도 들지만 다시 태어나도 치과의사이고 싶은 생각은 대개 비슷할 것이다. 30년 가까이 치과의사로 살아오면서 느꼈던 보람과 희비가 새삼 주마등처럼 스쳐가는 것을 개인적인 감상 때문이라고 치부하기엔 우리의 삶이 너무나 치열했다.치과를 처음 개업했을 때, 오후 5시까지 단 2명의 환자를 보고 답답한 마음으로 ‘환자님’을 기다리던 기억, 경험이 부족해 우는 꼬마 환자를 아빠와 엄마까지 모두가 붙잡고 진료했던 기억은 지금 돌이켜봐도 아찔하기만 하다.그러면서도 매주 일요일마다 부족한 부분을 메우기 위해 세미나에 열심히 참여했던 시절과 10여 년 동안 휴가 모두를 의료봉사에 바쳤던 날들, 구치과의사회와 서울시치과의사회, 대한치과의사협회에서 봉사했던 기억들이 새롭다.요즘에는 나름대로 새로운 개념들을 정리하는 데 매진하고 있는데, 이 모든 것들이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치과는 새로운 재료와 치료방법들이 계속 개발되므로 배우려면 힘도 많이 들지만 과거에 어려웠던 술식들이 수월하게 되어서 좋을 때도 많다. 특히 여러 가지 새로운 술식을 필자와 같은 모임에서 활동하는 우리나라의 치과 선후배가 부지런히 연구를 해서 쉽게 적용할 수 있게 해 주므로 늘